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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은 읽으면서 경험하지 못한 생활상, 사회구조, 시대적 정서 등을 체험하게 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생각이나 발언은 소설줄기를 삼는 핵심으로 보이지만,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시대적 배경이 맞아 떨어져야 소설로서 가치를 보이는 듯하다.
최근, 짧은 역사소설 한 편 읽다가 시대와 등장인물들의 아귀가 맞지 않은 줄거리가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소설들은 어떻게 시대적 배경들을 독자들에게 설명했는지 살펴보았다. 서양의 이집트 문화를 다루었던 람세스와 일제 강점기 사건들을 중심으로 하는 아리랑의 시대적 배경 설명이 교과서로 남았다.
두 책은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이다. 당시 읽을 때는 줄거리만 관심이 있었는데, 다시 어떠한 목적(시대적 배경을 어떻게 설명했나)을 두고 읽어보았다.
"세티 시대의 이집트에서는, 신전들은 신전에 맡겨진 식품이나 물건들을 다시 분배해야 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파라오 문명의 태동기 때부터, 정의와 진실의 여신 마아트의 규범은 신들의 축복을 받은 땅의 아이들이 누구라도 부족한 것이 없기를 원했다.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굶주림으로 고통을 당한다면, 어떻게 축제를 치를 수 있겠는가?
국가의 정점에 있는 파라오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키의 역할 뿐 아니라, 배에 승선한 선원들의 단결을 확고하게 하는 선장의 역할도 했다 한 사회를 이끌어가는 데 필요한 연대의식을 심어주는 것은 선장의 책임이었다. 연대의식 없이는, 사회는 분열하고 내부 갈등으로 명망하고 만다"/람세스2편 41쪽/크리스티앙 자크 장편소설, 김정란 옮김
람세스에서 이집트의 역사적 관계 설정이나 왕권과 관련한 권력 및 사회구조 등의 설명은 이 소설을 지탱하고 있는 주요한 배경인데, 소설을 이끌고 있는 등장인물들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폭넓은 범위에서 하나의 이야기거리들이 전개되는 형식이다. 등장인물들의 대화내용을 쏙 빼고 설명하듯이 붙여 놓은 배경들만 읽어보면 이집트의 문화를 간접체험할 수 있다. 이것이 역사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다.
"들판에 겨우내 쌓였던 눈이 녹고 있었다. 죽은 것처럼 가지만 앙상했던 나무들 모듬에도 유록빛 기운이 신비스럽게 내비치기 시작했다. 연해주에 늦은 봄이 오고 있었다.
부지런한 조선사람들은 벌써부터 농기구를 들고 나서고 있었다. 땅을 파자는 것이 아니었다. 눈이 다 녹으면 곧 시작해야 될 논농사를 위해 눈 녹는 물을 허실하지 않고 군데군데 보에다 가두려는 것이었다. 햇살은 따스하고, 바람은 포근하고, 얼음덩어리가 다 되었던 눈들은 푹푹 녹아내리고, 새들은 맘껏 날며 경쾌하게 지저귀고, 농기구를 든 사람들은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아리랑10편 123쪽/조정래
아리랑에서 시대적 배경의 설명은 익숙하지만 사실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더 많다. 당시의 사회상과 직업, 농사방법 등의 설명은 평화로운 농촌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평화로움의 배경 위에 반전되는 사건들이 놓여져 소설을 이루고 있다. 조정래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줄거리에 얽매여 읽지 않아도 될 정도로 폭 빠져 들게 하는 매력이 있는데, 그 이유가 소설의 시대적 배경설명에 충실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리고 각 권에서 어떠한 부분이라도 한 장을 떼어서 보면, 앞뒤의 줄거리를 몰라도 한 편의 에세이로도 독립되곤 한다. 위대한 작품들이다./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