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렸던 자료인데, 인터넷 어느 개인 홈페이지에 제 글을 자료로 소개한 곳이 있어서 역으로 제가 다시 퍼왔습니다. 해당 매체인 연세대 대학원신문의 몇 호에 실렸던 글인지는 아직 확인 못했습니다.이재수]

 

[연세대 대학원신문] 특집 - 문화예술진흥정책 진단

 

현직 영화감독이 문화부 장관으로 등용되는 등 문화예술행정의 개혁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문화예술진흥 정책이 단순히 ‘돈’을 보조하고 생색내는 시혜성 행정으로부터 벗어나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제도적 지원·육성책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하며 우리 신문은 문화예술진흥정책에 대한 특집을 마련했다.<엮은이>

 

② 지원기준의 민주성과 공공성 제고

숫자 놀음 아닌 전문적·객관적 기준에 근거해야

이재수 / 미술인, 한남대 강사, kabn@kabn.net

 

문화생산물을 창작할 수 있는 권리, 문화예술인들이 뼈를 깎는 희생을 담보로 대중들의 정서함양에 이바지해야 할 의무. 이러한 권리와 의무가 제도적 장치를 통해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부는 최선의 노력과 방법을 동원하여 문화예술 창작과 육성을 지원해야 한다.

 

문화예술진흥의 중요한 기초재원은 문예진흥기금이다. 그러나 기금 심의 및 지원과 관련한 실무(한국문예진흥원 및 지방자치단체)는 문화예술인들이 의무를 수행하거나 국민들이 질 높은 문화예술을 체험케 하려는 의도에서 어긋나 있다. 기금을 지원받아 문화예술 행사를 주최한 경험이 있다면, 기금 운용이 본래의 이념(Mission)과 방향에서 심하게 틀어져 있음을 감지하고도 남는다.

 

문화예술인들이 기금을 쉽게 지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예전에 기금을 지원했던 경력이 있는 사업은 심의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다양하게 변화하는 문화적 욕구와는 관계없이 실적 위주의 예술행사를 고집한다면 기금을 지원받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행정실무자들은 지원 경력이 있는 사업을 다시 지원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대전광역시의 당해 년도 문예진흥기금 지원액 현황(www.metro.daejeon.kr) 일부를 예로 들어보자. 2002년도에 지원 경력이 있는 미술 분야의 사업 99%에 2003년에도 똑같은 지원액이 책정되었다. 지원을 신청한 단체들의 사업규모나 사업성이 각기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든 단체에게 일괄적인 액수를 책정한 것이다. 지원 경력을 절대시하는 사업 선정과 그에 따른 편의적인 지원액 책정은 사실상 어느 자치단체에나 만연한 현상이다. 현실적인 사업성 검토 없이 지난 해 지원금 숫자를 이어받아 숫자놀음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형평성 잃은 숫자놀음은 신규사업이나 사업성이 우수한 프로그램들의 설자리를 잃게 한다. 위 자치단체의 경우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 사업들은, 사업성은 갖추었어도 지원 경력이 없는 신규사업들이다. 물론 극소수의 신규사업이 지원 대상에 선정된 경우가 있기는 하나, 기존의 사업들을 모방하여 실적기준을 채운 행사들이 대부분이다.

 

지원 경력에 따른 재지원이나 실적위주의 심의기준은 문예진흥을 위한 정책이라기보다는 행정편의에 치우친 결과이다. 기금 지원 자격을 빌미로 수년 간 문화예술인들에게 경제적 희생과 실적위주 사업을 강요하는 처사다.

 

불합리한 지원기준에 따른 폐해는 문화예술 현장에서 곧바로 나타난다. 문화예술인들은 기금 지원 대상에 포함되거나 재지원을 받기 위해, 사업의 질적 향상보다는 실무 편의를 따르는 사업을 기획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고자 하는 시민들로서는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셈이다.

 

문화예술은 미적 기준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재테크 문화산업이나 마찬가지이다. 결코 행정편의주의에 이끌려 가서는 안 된다. 예술인들이 전문성과 객관성이 결여된 심의로 인해 창작 의욕을 잃거나, 시민들의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문예진흥기금 선정을 위한 심의는 무엇보다 사업의 창의성과 대중들에 미치는 생산적인 파급력에 기반한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기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후 평가도 마찬가지이다. 문자 그대로 문예진흥에 얼마만큼 기여를 했는지 객관적인 조사를 근거로 재지원의 타당성을 가늠하는 일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