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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소에서 만난 폐간호
이재수글을 쓴 시기 2001.
"통행권을 뽑아가세요"
고속도로에 들어서려고 통행권을 뽑을 때마다 혼자 빙긋 웃는다. 자동차가 통행권 발급 기계 앞에 서면 통행권이 자동으로 쑥 나온다. 개구장이가 장난스럽게 혀를 날름 내미는 것처럼 우스꽝스럽다. "내 혀를 뽑아가세요"라는 소리처럼 들릴 때도 있다.
혀를 뽑아들고 쭉 뻗은 고속도로 본선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우스꽝스러운 여운은 스피드감에 밀려 짧게 마감한다.
먼 거리를 갈 때는 휴게소에 들리게 된다. 아무리 바빠도 휴게소에 잠깐 들려 볼일들이 있다. 운전노동에서 오는 피곤함을 잠시 달래기 위해 들리거나 끼니를 때우기 위해 들리기도 한다. 피곤하지 않아도 습관적으로 들리는 사람도 있다. 휴게소에 볼거리가 있어 들리는 사람도 있다. 어느 휴게소는 옛날 농기구를 전시한 작은 박물관이 있는가 하면, 어느 휴게소는 사진작품을 전시하는 전시실도 마련되어 있는 있다. 휴게소마다 조금씩 다른 특징이 있다.
나는 고속도로에서 반드시 어느 휴게소를 들리겠다고 미리 계산하여 운전하지는 않는다. 거리상 적당한 곳을 찾아들어 가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휴게소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올 한 해는 짧은 거리를 운행해도 반드시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렸다. 평균 한 달에 한 두 번 고속도로를 탄 듯 하다.
휴게소에 들리면 반드시 두리번거리며 찾는 책이 있다. 휴게소마다 작은 책코너에서 잡지나 소설책들을 팔고 있지만, 내가 찾는 책은 [비매품]이다. 식당 계산대나 마켓계산대 위에 놓여져 있다. 한국도로공사 홍보실에서 달마다 발행하는 '열린 마음 열린 길'이라는 서른 댓 쪽 남짓한 정기 간행물이다.
그날 하루 고속도로가 정체되거나 차를 세우고 기다려야 하는 일이 있을 때 보려고 챙긴다. 고속도로 소식, 짧은 콩트, 문화컬럼, 에세이, 문화예술인 탐방, 차량관리요령 등으로 엮어져 있다. 천천히 읽어도 1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그 동안 첫 쪽부터 꼼꼼하게 읽어 내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에세이나 문화컬럼 한 두 편 골라서 읽는 일이 고작이었다.
이번 호(2001. 12)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앞서 가던 차들이 연쇄충돌을 하여 30분 이상 고속도로 위에서 서 있었다.
이번호 내용을 소개한다.
·먼저, 시인 박라연이 쓴 `길과 인연'에 관한 글이다. '물길 산길 마음길을 여는 방식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한 쪽 분량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 짧은 글이 무슨 소리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길을 통해 삶의 철학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지, 길이 우리 마음을 위해 존재한다는 이야기인지 표현들이 애매하다. 온갖 아기자기한 단어들은 모두 동원했는데 읽은 사람은 그저 시큰둥할 뿐이다. 작가의 감성을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내보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고속도로 2600km 시대가 활짝 열린다'.
고속도로의 변화로 인하여 전국 생활권이 반나절 권으로 연결되었다는 길의 역사에 대한 글이다. 고건웅(한국도로공사 홍보실 대리)씨가 글을 썼다. 이 글은 고속도로가 국토의 균형발전과 조국의 근대화에 이바지했다는 뻔한 사실 이외에는 주목할 만한 내용이 없다. 글쓴이가 신중하지 못했던 구석도 발견되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만 해도 우리에게는 가난의 찌든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해마다 이른 봄이면 많은 사람들이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해야 했다....]
글 시작을 알리는 첫 멘트이다. 첫 멘트를 눈에 넣자 마자 글 내용이 뻔할 것이라는 짐작이 섰다. 인내심을 확장하여 끝까지 읽어 내리기는 했다. 여기서 위에 첫 멘트는 적절한 비유는 아닌 듯하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에 사람들이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했다는 말은 근거가 없다. 30여전(70년대 초반)이라고 하면 그 당시는 새마을운동 사업으로 인하여 농촌에 어느 정도 살림이 늘어나 있을 때였고, 산업사회의 물결을 타고 도시의 공단에 굴뚝이 높이 섰던 때이다. 나무껍질을 먹어야할 정도로 기근에 시달렸던 때는 아니다. 30여전 전이 아니고 50여년 전이라고 표현해야 맞을 듯하다.
·'신라의 달밤, 김상진 감독. 2001' 촬영지 경주를 소개했다(글/박경수, 사진/배종섭)
경주는 동네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한다. 교과서나 문화유적 관련 책자에서 볼 수 있는 귀한 문화재들 사진이 실려 있다. 기본적인 자료이지만 답사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한번 챙겨 놓아야 할 자료이다. 경주에 가기 전에 한번 들춰보고 숙지해야 할 만한 글들이다.
'길위에 인생' 동춘서커스단 단장(박세환)이 소개되었다. 서커스 인생 40년을 짧게 조명한 글이다. 서커스는 어른들에게는 어릴 적 향수를 달래주는 그리움으로, 아이들에게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공연문화이다. 우리의 공연문화의 단면은 이렇게 자신들을 희생하는 자들에 의하여 맥을 이어 왔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글이다. 그들의 고난과 배고픈 철학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다양한 우리 문화의 형태에서 질긴 문화인의 힘을 찾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도둑맞은 시간을 찾습니다.'
이 글은 글쓴이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편집 오류가 아니라면 편집진에서 쓴 글이 아닌가 싶다. '시간은 금이다' 평범한 문구이지만 우리가 살면서 아깝게 버리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 돌아보아야겠다. 돌아보는 시간도 아깝게 버리는 시간이 될지언정...
·중견사진작가 구본창 교수의 예술관이 소개되어 있다. 관심 있게 본 글이기는 하나 작가 프로로그로 그친 듯 하여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딴지박물관 조대연님이 주거문화에 대한 글로 '대문(大門)'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주거문화에서 대문의 상징이나, 안과 밖의 소통공간으로서 의미 등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활철학을 빗대어 정리한 글이다. 썩 좋은 지식으로 남을 듯 하다.
그 외
'공존의 미학' 그 작은 텃밭에는 사랑이 잔잔하다(이종배, 자유작가연대)
`15년된 우정의 카메라'(신성웅),
`아버지가 주신 사랑을 간직하며'(황미란)
`이승영 추리작가의 꽁트'(12월의 러브레터)
`life is Happy'-(김윤정, 김영진, 정보사, 신호청)
모두 좋은 글이다. 진한 감동을 주는 글도 있었고 풋풋한 재치를 보여준 꽁트나 즐거운 글도 있었다.
속상한 점도 하나 있었다.
(편집후기) "여러분 다시 뵐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이 간행물이 도로공사의 재정여건 때문에 더 이상 발행이 어렵다는 인사를 했다. 잡지나 간행물 창간호에서 시작을 알리는 열의에 찬 문구는 보았어도 아쉬운 폐간 인사는 처음 본 듯하다. 소문 없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서 존재가치를 못 느끼게 했던 수많은 잡지들보다는 훨씬 여운이 남는다.
TBC(동양방송) 폐국방송을 보던 때가 떠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