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소통 - 시각문화 - 잡동사니
미술은 다소 비밀스러운 영역이다. 비밀스러운 영역 안에서 분석과 해석도 추상성에 의지하기도 한다. 창작의 논의는 얽혀 있는 사고나 지각을 충분히 이해시키고 스스로 형상화하려는 노력이다. 실질적인 비평도 형식과 내용 분석에 관련된 능력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일이다.
미술은 형식과 내용에서 항상 다양하게 변화해 왔다. 다양한 문화 앞에서 함께 어깨를 걸고 있는 삶의 동반자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로든 미술작품 생산은 감상자에게는 유희와 즐거움의 대상이다. 때로는 반항이나 거부감의 대상이 될지라도 미술이라는 거대한 몸체는 흔들리지 않는다. 미술가들이 창작활동에 있어서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부분도 바로 흔들림 없는 몸체다.
작가들이 작품을 통하여 자신의 정서나 철학을 내보일 때, 각기 다른 논리방식을 적용하기도 한다. 다른 논리방식을 창작과정 안에서 객관화시키는 일이 창작에 있어 가장 크게 와 닿는 고통이다. 또한 이를 성공하지 못하면 자칫 창작의 근간이 흔들릴 위험이 있다. 그러나 객관화시키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흡족한 결과물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성공적인 결과물은 객관화시키는 과정에 지나치게 기대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결과물에서 <작가의도>가 빗나가 감상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해도 실패작으로 규정할 수 없다. 이 문제는 해석의 입장에서 작가의도에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 없다는 미학개념과도 상통한다. 작가의도는 창작의 과정 안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영감이나 기법의 등장으로 일부 소실되게 마련이다. 소실된 부분은 빈자리가 아니다. 다른 모습으로 재생되어 자리를 메우게 된다. 본래의 의도에 덧붙여진 현상들이지 의도 자체가 완전히 뒤바뀌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작가의도는 결과물의 최초 착상이다. 많은 작가들이 창작과정을 거친 결과물에 최초의 작가의도를 고집하려는 경향이 있다. 감상자의 판단을 묶어버리려는 속마음인지도 모른다. 감상자에게는 자유로운 판단이 위안 삼을만한 가치기준이다. 감상자의 상상력까지 억지로 제한하려는 소통은 수명이 짧다.
시각예술의 성공은 소통을 전제로 한다. 작품이 감상자와의 소통에 실패하게 되면 곧 창작의 실패일 수도 있다. 이러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최초의 작가의도를 최종적인 결과물에까지 적용하려는 경향이 많다. 창작과정에서 변화하는 최초의 의도를 두려워한다면, 의미 없는 소통의 성공은 있을지언정 감상자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폭넓은 소통에 근접하기에는 너무 멀다.
미학이론에서 작가의도란 작가가 감상자에게 억지로 부여해야 하는 이념의 줄기가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창작의 과정은 결과물에서 추론된 것이며, 과정자체가 소통의 근간을 흔들지는 않는다.
미술은 시각적인 유희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의도된 감정만을 전달해야 하는 대중성 있는 작업에서 보다 자유롭다. 일반적으로 소통의 개념의 의도된 감정수용이라 할 수 있겠다. 슬픈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계획하여 만든 영화를 보고 슬픈 감정을 느낄 때가 소통의 성공이라고 보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미술의 소통은 일방적인 감정 부여로 막을 내릴 수 없는 오묘한 장이다. 미술작품이 감상자의 상상력을 묶어놓는다면 미적 대상은 공유될 수 없다.
감상자의 상상력을 풀어주자. 그리하면 미술가들의 창의력은 더욱 자유롭고 풍성해질 수 있지 않을까. 작가가 의도한 행위에서 벗어난 작품이라 하여 작품자체를 의심 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창작과정에서 변화된 의도를 수용하고, 감상자는 작가의도에 이끌리지 않는 자의적인 해석 경험이 필요하다./숲(월간 미술커뮤니티 2002.12 대전,충청청년미술제 전시회에 붙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