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소통 - 시각문화 - 잡동사니
-2010 환경미술협회 천안지부 회원정기전에 부쳐-
글/ 이재수(시각문화비평)
자연환경을 매개로 한, 또는 환경을 주제로 한 시각예술 작품의 생산이 과연 환경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얼마만큼 기여할 수 있는가. 아니면, 자연환경을 주제로 한 작품의 장르를 진정 ‘환경미술'이라고 지칭할 것인가 하는 이론적 담론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미술을 통한 환경에 대한 접근은 단순한 캠페인을 떠나 자연환경을 기록하거나, 환경파괴의 요인들을 기록하여 이를 감흥으로 전달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환경계몽에 얽매인 작업은 자칫 작가가 감상자에게 수동적인 역할 부여에만 집착할 위험이 있고, 작가 스스로도 한정된 소재 위에 굴림하고자 하는 안일한 작업경향으로 치닫게 될 소지가 다분하다.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작가가 감상자의 몫까지 전횡하여 작가들만의 의미 없는 리그로 전락할 소지도 안고 있다. 작가가 감상자의 몫에 개입한다는 것은 예술권력을 통해 감상자를 지배하는 형식과 같다.
예술권력이란 감상자에게 의지와는 다르게 행위자로 인하여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하는데, 근래에 이르러 감상자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작가들의 행위들이 특정장르에 한정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미술은 감상자의 몫이 얼마만큼 부여되었느냐에 따라 작품생산의 의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작가가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감상자의 생각들을 움직여야 하는 부담감을 안고 있다. 이러한 부담감의 해소는 감상자들의 다양한 판단과 해석을 이끌어내는 데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지만, 다양한 판단과 해석은 작가들의 애매한 행위에서는 나올 수 없다.
환경은 단순한 시각예술의 주요한 소재로 굴림하고 있기는 하나, 작가들이 내재하고 있는 환경에 대한 인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 숭고한 소재로서 가슴에 담고 있다.
몬드리안은 “외부세계의 현실이나 자연을 재현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추상회화도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규정하였듯이, 미술은 ‘환경’이라는 용어를 특정하지 않아도 그 범위 안에 있다 하겠다.
그렇다면, 미술을 통한 환경관련 메시지는 그리 새로운 작업이 될 수 없다. 현실참여를 위해 시대적 현상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의 작업들이 종종 거론되고 있기는 하지만, 실상 시각예술이 환경의 근본적인 역할을 대변하지는 못한다. 시각예술의 주요 모태가 자연환경 등에서 비롯된다는 것 하나만으로 시각예술은 이미 자연환경 등의 계몽역할을 하고 있다.
작가들이 환경문제의 심각성 때문에 환경을 매개로 한 작품을 생산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고, 환경의식 또한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평범한 범위 안에서 논의된다. 즉, 자연환경을 기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어도 환경문제에 전문성 있게 논의될 수 있는 현실참여의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작가가 자연을 예찬하거나, 캔버스 위의 시각이미지 하나만을 놓고 ‘환경미술'이라고 명명하기에는 대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폭을 지극히 제한하는 일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옳지 못한 예술권력의 남용과도 같다.
미술행위는 어떠한 이념 안에서도 자유롭다. 나무 한 그루를 그렸다고 가정할 때, 감상자로 하여금 단순한 나무 형태의 시각만족만을 전달하지는 않는다. 작품소재의 역사, 전설, 생태 등을 기록하여 전달하기도 하고, 작품소재 주변의 이야기나 미래를 예견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자연환경을 소재로 한 작품과 환경파괴의 현장을 소재로 한 작품, 자연환경과 어울릴 수 있는 작품의 구성 등을 억지로 ‘환경미술'이라고 구분하고 있다. 전혀 새롭지도 않고 특별한 이론적 전개가 없는 장르에 불과하여 시대적 관심에 맞게 ’환경'이라는 용어에 미술을 개입시킨 결과다.
그러나, 시각예술은 인간이 인간을 위한 인본주의 사상에 입각해 있다. 자연환경이 인간의 삶 전부와 함께하고 있다고 볼 때, 환경에 대해 어떠한 방식으로 접근하여 이론 정립을 할 수 있을 것인가는 환경을 주요한 소재로 활용하는 작가들에게 꾸준한 연구과제로 남는다.